•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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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로컬충남] “장사익. 우리시대 최고의 가객(歌客), 광천 삼봉이 고향인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음악은 어디에도 얽매지 않고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수줍은 듯 단호히 말하는 사람, 시를 수백 번이고 읊조려 내 시로 만들고야 만다는 사람, 마흔 다섯 나이에 평생 해보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 성공한 사람, 노래는 팔자고 운명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세계적인 소리꾼 장사익. 그의 이름은 이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북악과 인왕을 바라보며 고단했고 못마땅했던 지난 세월을 필름으로 돌리는 희끗한 머리의 촌사람, 쉰여덟 해 그의 생애에는 우리네 고된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구슬프게 울리던 ‘찔레꽃’이 어느새 장중하고 무겁게 내리치는 듯 더불어 사는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안고 무게를 풀어주는 장사익의 노래는 ‘사람이 그리워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고 있다. 마흔다섯 나이에 느지막이 시작됐지만 그의 변신은 결코 늦깍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풍김이 있다. 수더분한 충청도 사투리에 변함없는 겸손이 더욱 정겨운 사람이다. ‘현실에 집착하는 끈을 놓으니 꿈이 잡히더라’는 장사익의 말은 척박한 현실에서 꿈을 이룬 그의 삶이며 신명이다. 한번 마음먹고 3년만 죽도록 해보자. 장사익은 1993년부터 김덕수패를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불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웅변을 했다고 한다. 워낙 음치여서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된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에 올라가 마음껏 목청을 높였다. 그때 ‘소리’가 터졌다고 한다. 오서산의 기를 받아서 일까. 그의 내공이 터진 것은 1993년의 일이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 태평소로 장원을 차지하면서 드디어 ‘등극’을 한 것이다. 같은 해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는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그에게 1993년은 국악연주자로서의 자리를 확인해 주었고 ‘시’에 눈을 뜨게 해준 의미 있는 해로 기억된다. 1994년에는 자신을 확인하는 계기를 갖는다. 또다시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금산농악 태평소로 장원을 차지하면서 ‘장사익’을 재확인한다. 결국 태평소가 장사익의 노래 길을 열어 준 셈이 됐다. 

그해 11월에는 서울 신촌에서 ‘소리꾼’으로서 첫 공연을 갖게 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흥얼거림의 미학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06년 장사익과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쓴 글의 일부다. 이후 12년 만인 올해 장사익은 칠순을 맞았다.

■ 장사익, 가장 한국적인 창법의 소리꾼
장사익은 마흔 다섯인 1994년 1집 ‘하늘가는 길’로 늦깎이 데뷔했다. 주변 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긴 장사익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제안으로 1994년 11월 신촌의 소극장에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당시 100석의 공연장을 이틀 동안 800명이 찾았다고 한다. 이듬해엔 ‘찔레꽃’이 담긴 데뷔 앨범 ‘하늘가는 길’을 냈다. 우연히 집 앞 화단을 지나가다가 화려한 장미꽃 뒤에 초라하게 핀, 그러나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찔레꽃을 보고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찔레꽃이 꼭 자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일까. 장사익의 노래는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한바탕 울어주는 노래이고, 기쁜 사람들과도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는 노래다. 이처럼 홍성의 광천사람 장사익은 처음으로 공연을 시작한지 어느덧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광천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서울의 선린상고를 졸업한 이후 보험회사, 가구점 점원, 전자회사 영업사원, 마지막으로 한 일은 매제가 운영하던 카센터였어요. 당시 기술이 없으니 맨날 청소하고 주차해주고, 커피도 타주고 했었죠. 한 3년 정도 했는데 사업이 어려워 월급도 못주는 형편이 되다 보니 내 입이라도 하나 덜자 하는 마음으로 그만두었죠.”

장사익의 노래엔 험난한 인생 고갯길을 돌고 돈 삶의 소리에는 독특한 힘과 애수가 가득하다. 또한 장사익의 노래는 대중가요, 재즈, 국악이 묘하게 뒤섞여 애달프고 구슬픈 듯 애절함으로 힘이 넘치는 특유의 창법을 잘 드러낸다. 이런 묘한 뒤섞임 속에 인생사를 노래로 읊조리며 가슴으로 토해내듯 부르는 구성진 목소리는 ‘가장 한국적인 창법의 소리꾼’으로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애잔하고 깊은 울림이 더한다.

장사익을 세상에 알린 대표곡 ‘찔레꽃’엔 곰삭은 삶이 켜켜이 쌓여 녹아 있다. 늦은 나이에 데뷔해 8장의 앨범을 내면서 한국적 소리를 온몸으로 불러 온 장사익은 지난 2015년 한때 위기를 맞았다. ‘찔레꽃’ 전국 순회공연을 마친 뒤 성대에 이상이 왔기 때문이다. 목에 자리한 혹을 도려낸 뒤 장사익의 목소리는 다시 생명을 되찾을 수 있었다. “처음 진단을 받고 수술 얘기가 나올 때는 목소리가 안 나올 수도 있다는 말에 두려움이 앞섰죠. ‘이 나이에 무얼, 뭘 해먹고 사나’하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도 했어요. 그래도 긍정적인 결과를 믿기로 하고 수술을 했죠. 수술이 끝나고 말을 못하는 시간 동안 많은 걸 느끼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이런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했죠. 그러면서 노래라는 것이 나한테는 꽃이고 노래가 없는 인생은 눈물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꽃인 듯 눈물인 듯’이다. 지난 2016년 10월 성대를 수술한 이후 성공적으로 무대에 섰다. 노래 인생에서의 위기가 전환점이 돼 새로운 노래 인생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장사익은 또 한 번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치료 이후 이번 공연과 함께 앨범(9집) 발매도 준비했다. 장사익은 “우리들 인생의 시간과 비슷한 야구 경기는 9회를 치른다. 어느덧 난 종반전을 향하고 있다”며 “매회 최선을 다해야겠다. 기력도 감각도 느슨해진 지금, 힘 빼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노래를 하려 한다”고 천진스럽고 순박하리만큼 환한 미소로 말한다.

▲모교인 광천중학교를 방문해 기념식수를 하는 장사익(광천중 17회·사진 왼쪽)과 오른쪽은 제14대 총동창회장을 지낸 최건환(광천중 19회)경주월드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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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인생을 노래하는 소리꾼 장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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