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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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주민들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임영택 이장이 초록 모종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홍성=로컬충남] 서른 살이 되던 해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상경했으니 18년만이었다. 물론 첫 해에는 아버지에게 쫓겨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무작정 짐을 싸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제 더 이상 아버지도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청년은 마을에 정착했고 농부가 되었고, 마을에서 막내가 됐다. 그 때도 막내였는데 지금도 막내다. 금마면 인산리 석산마을 임영택 이장은 지난달 2일자로 마을이장이 됐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났던 임 이장은 자신을 서울 유학파라고 소개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합격통지서를 받았던 임 이장은 합격통지서라는 작은 종이 하나에 의문이 들었다. 중학교 3년 내내 공부를 했는데 겨우 그 결과가 작은 종이 하나라는 사실에 허무해졌다. 고등학교 입학 후 그는 문예부에 들어갔다. 교육주체에 대한 고민을 했고, 스스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며 책도 많이 읽고,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여러 일들을 하며 그 고민의 깊이는 더욱 깊어졌다. 이후 군대를 가게 되면서 고향에 돌아오기로 마음먹었다. 농사를 짓기로 하면서 가족 4명이 비닐하우스를 짓고 딸기를 심었다. 딸기를 심었던 첫 해 많은 사람들이 다 버리라고 했던 딸기는 그 해 마을에서 가장 많은 수확을 냈다.

“그 당시 큰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는데 딸기를 그냥 와서 따서 먹고는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이가 먹는데 농약을 사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때부터 친환경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2005년에 무농약인증을 받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실패와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경매 가격이 안 나올 때마다 좌절했다. 홍성유기농조합 설립 초기 조합원으로 참여하며 유기농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눌 동료가 생김에 기뻐했다.

“농부는 직업이다. 나 스스로 재미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에서 그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 농사다. 지금도 모를 밭에 정식해 심은 뒤 막 싹이 터오는 그 모습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작물을 심는다.” 임 이장은 이장이 되고 나서 아주 사소하지만 기본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선 이장 일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공문만 한 무더기다.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이장님들은 거의 대부분 오래 일해 왔던 분이니 빨리 처리하겠지만 초보인 나로서는 업무 파악하는데만 한 달이 걸렸다.”

어느 날 쓰레기를 태우지 말라는 마을방송을 하는데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를 태우지 않으려면 쓰레기를 태우지 않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처음 고향에 와서 가장 큰 불편함이 쓰레기 문제였다. 분리수거를 해도 버릴 곳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내 불편함으로 치부했던 문제를 불편하지 않고 주민들이 준법을 지킬 수 있게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다. 분리수거한 쓰레기도 자원화 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찾아볼 수 도 있을 것 같다.”

1971년생인 그는 고향에 돌아왔을 당시에도 마을에서 막내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막내다. 20년을 넘게 마을에 살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이장이 되고서 알았다. 이장직을 보는 일이 만만하지 않고 세세한 부분을 다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장이 되고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계다. 마을주민들의 관계를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조율하는 일,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이장의 역할과 임무다. 이장 일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젊은 이장 임영택을 응원하게 된다.

김옥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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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동안 마을의 막내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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