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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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로컬충남]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충남도는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사업들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홍성지역 3·1운동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확한 사료가 불충분한 상황이다. 이에 홍주신문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홍성지역 3·1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충청도에서 최초 3·1운동은 3월 3일 예산군에서 오후 11시경 윤칠영 등 수 명이 읍내 동쪽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작됐다.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김진호 연구원의 ‘홍성의 3·1운동’에 따르면 광천지역 3·1운동은 이명종, 박원식의 주도로 시작됐다. 이명종은 3월 6일 서울 3·1운동 상황을 듣고 독립선언서를 읽고 난후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다. 3월 8일 서울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관련 내용을 광천시장과 옹암리 2개소 벽에 부착했다. 이후 3월 16일 박원식, 오인섭은 서승태를 찾아가 독립선언서 문구를 새로 가제해 필기할 것을 부탁했다. 이를 참고로 독립선언서 510매를 만들어 배포했다. 3월 21일에는 광천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고 4월 5일에는 독립만세를 부르려는 시도가 있었다. 금마면에서는 민영갑 등의 주도로 4월 1일 가산리에 임시로 가설된 연극 공연장에서 있었다. 4월 1일 연극이 공연되는 중 조한원이 군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4일에는 금마·홍북·홍동·구항 등 4개면 24개소에서 주민들이 마을 주위 산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횃불만세운동이 진행됐다. 홍동면은 4월 4일 각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횃불만세운동이 전개됐다. 4월 8일에는 홍동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장곡과 구항에서도 4월 4일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고, 홍성 읍내는 4월 1일 금마 3·1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이 2일 읍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무자비하게 진행됐는데 많은 이들이 태형 처분을 받았다. 홍성에는 7명 순국, 4명 부상, 295명이 태형과 옥고를 겪었고 광천에서는 5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옥고를 겪기도 했다. 

홍주향교 손세제 장의는 “홍성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사상의식 측면에서 연구한 성과물이 없다”며 “특히 홍성의 3·1운동을 유림들의 사승관계를 살피지 않은 채 별도의 사건으로 이해하게 되면 유림들의 사회운동을 이해하는데 막대한 장애를 줄 수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이와 더불어 “일농 서승태의 사회진화론과 교육구국운동에 대한 연계를 규명하고 연구해야 한다”며 “몽양 여운형에서 출발해 홍성의 3·1운동에 대한 고찰이 이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승태는 국권회복을 위한 일환으로 홍주의병진과 기호흥학회 홍성지회에 참여, 1907년 신정면장 재임 중에 사재를 털어 상지동에 덕명학교를 설립하고 1911년 2월 광천 신진리에 덕명학교로 확장했다. 서승태는 의병 활동과 홍성지역 애국계몽운동 전개 등을 통해 지역의 유지인사로서 젊은이들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젊은이들이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수정 보완해 간략한 글로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수락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형목 책임연구위원에 따르면 서승태는 제2차 홍주의병이 일본군에 의한 탄압으로 실패하고 홍주 일대에서 자행된 대대적인 살육을 목격하면서 근대교육과 계몽운동에 주목했다. 1908년 기호홍학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독립선언서 등사 및 배포 혐의로 일경에 체포된 후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공주감옥에서 복역 후 출소했다.

덕명학교는 역사산술어학작문습자 등을 교육과정으로 삼았고 유용한 인재양성이 설립목적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일농 서승태의 삼요론은 역사적 정신, 상무적 기상, 경제적 사상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 사립덕명학교는 1915년 보통학교 설립을 인가받고 광천공립보통학교로 11월 3일 개교했다. 1938년 광천신진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광천신진공립초등학교, 1946년 광천제1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일제의 교육정책에 따라 덕명학교는 폐교되고 광천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됐지만 1990년대 덕명초등학교로 변경되면서 이름을 되찾았다.

김형목 책임연구위원은 “홍주지역 유림의 활동과 학맥에 관한 사료 발굴은 시급한 과제 중 하나”라며 “교육청과 군이 연계해 팔명학교로 대표되는 홍성의 근대교육기관에 대한 자료발굴과 조사도 실행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주도한 인물에 대한 연구도 확대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충남도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3·1운동의 중심지로서 충남의 위상을 제고하는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충남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를 구성해 3·1평화운동 백년의 집 건립, 3·1운동 100주년 정부기념식 충남 개최, 윤봉길 의사 창작뮤지컬, 내포신도시 충남보훈공원에 독립운동가의 거리 및 무궁화 테마공원 조성 등을 준비한다.

일농 서승태 묘소 비문.
김옥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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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지역 3·1운동의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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