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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로컬충남] 지난 24일 합덕읍 신촌초교를 찾아 방문했다.

8년 전 2014년 3월에 쓴 박병렬 동상기사가 떠올라 찾아갔던 것.

그러나 학교 현장의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이 변함이 없었다.

그때는 교사 입구 복도에 학교 졸업생 앨범 등을 2층 유리전시대 안에 전시하고 있었는데, 전시대가 없어지고 따로 보관 관리하고 있었다.

또 기록관리사가 있고, 그 업무 맡은 교사는 수업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날 8년 전에 보았던 앨범은 보지 못했다.

■ 2014년 3월 27일 기사

박병렬 선생이 1937년 거금을 희사해 합남공립보통학교(신촌초등학교 전신)를 세웠는데 1938년 6월 8일 그의 동상도 교내에 당시 충남지사가 참석해 건립했다.

이 동상은 우리나라 1세대로 손꼽히는 정관 김복진의 작품으로 세워졌으나 일제시대 일본이 침략정책에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부족한 물자 확보를 위해 우리나라에서 쇠붙이에 관련된 모든 것을 공출해가 그 이후 지금까지 교정에 동상 없는 받침대만 반세기를 넘어 70여년을 지켜오고 있다.(1면 박스기사)

■ 박병렬 동상, 정말 모르고 있다. 세운 열정 복원해야

지난 22일 합덕 신촌초교를 방문했다. 2004년경 이후 10년이 흘러 다시 찾은 학교는 여전했다. 10년 전 그때 ‘박병렬 동상’과 합덕 태생의 조각가 이국전 이야기를 모 지역신문에 쓴 적도 있었다.

올해 8월 15일엔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성지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이 예정돼 있어, 우강 솔뫼와 합덕 신리공소가 언론의 집중가 이뤄지고 있는데, 신리 성역화사업지역 옆에 바로 유서깊은 신촌초등학교(전신 합남공립보통학교(1937년 9월)→신촌심상소학교)가 있다.

‘유서가 깊다’는 표현은 학교가 오래돼서가 아니라 운동장이 넓은 이 학교에 그에 값하는 보물과 사연이 숨어있어서 이걸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으면 해서다.

이 학교 입구 왼쪽 소나무숲 중앙에는 이 학교 설립자인 박병렬 동상이 소화 13년(1938년)에 건립(같은 날 학교도 낙성식을 함)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현재까지 동상 모습은 간데없이 받침대만이 현재 오똑 서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이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부족한 군수물자를 채우기 위해 조선에서 절의 종, 가정의 쇠붙이 금속은 모두 공출해 조선에서 침탈해 갔기 때문에 ‘조선 유일의 조각가 정관 김복진(金復鎭,1901~40)이 만든 박병렬 동상’도 그때 공출돼 작품이 유실된 탓이다.

■ 정관 김복진…

그럼 김복진은 누구일까. 우리나라 근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근대미술가 11인으로 손꼽혀 조명이 되는 작가다.

충북 청원 태생으로 1919년 배재고보를 졸업 뒤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해 극단 토월회, 미술교육기관 정측강습원, 문예조직 파스쿨라를 결성하고 1925년 8월 카프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10월 서울 YMCA에 미술연구소를 설치 운영했다.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돼 투옥당해 만5년 감옥생활을 했다.

대표작은 ‘백화’(1938), ‘소년’(1940),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 본존불’(1936), 속리산 법주사의 ‘미륵대불’ 등인데 다 유실돼 그 명성이나 예술성은 없어지고 말았다.

■ 왜 신촌학교에?

왜 김복진의 작품이 서울서 먼 당진의 신촌학교에 세워졌을까?

이 의문은 합덕 태생의 조각가 이국전(李國銓) 때문에 풀린다. 그는 가난해 보통학교만 나와 경성 정자옥(죠지야 백화점 1922년 세워짐, 현재 롯데미도파) 점원으로 들어가 여가를 이용해 선배인 김복진씨 지도를 받아 배운 것이 조선총독부가 한 조선미전에서 첫 입선(21세때)를 차지해 조각가의 길을 걸었다.(매일신보 1936.5.13) 이때 김복진의 제자 3명이 나란히 입선했다.

1935년 2월 김복진은 사직공원 옆에 미술연구소를 차려 제자로 이국전, 홍순경, 박승구, 윤효중, 이성이를 받아들여 밀러의 동액을 만들고, 공주 영명학교 윌리암 교장 동상, 송병우 동상, 손봉상 동상, 조선일보사 방응모, 정봉현, 김윤복 등의 흉동상을 제작했다.

이때 이국전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구조사전람회에 작품 ‘습작’으로 입선을 했다. 1940년 8월 18일 김복진이 죽고 그해 그의 유작전이 열렸다.

동아일보 1938년 6월8일자, 조선일보 6월8일자를 보면 ‘합덕 교육계 은인 박씨 동상건립 제막식’을 알리는 기사가 나온다. 신촌수상소학교의 설립자 박병렬(朴炳烈)씨 기사로 당시 6월 4일 식을 가졌는데 이 동상 제작자가 이국전의 스승인 정관 김복진이었던 거다.

1941년 11월 이국전은 정자옥 화랑에서 첫 조소 개인전을 연 다음, 1942년 스승이 운영하던 사직정 경성미술연구소을 맡아 제21회 조선미전에 낸 작품 ‘수(首)’가 특선을 하고 수업 받던 제자 염태진이 입선을 한다. 이해 봄 이국전은 경성미술연구소를 창성동 자택으로 옮겨서 운영을 한다.

조각가 이국전의 조선미전에서의 작품활동은 제15회(1936)-소림씨상, 노부, 제16회-A씨 수상, P여사지상, 제19회(1940)-흉상 제22회(1943)-소년(특선), 제23회(44년)-어느 음악가의 얼굴. 해방이 된 이후 제1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1949년 10월)에 심사위원으로 김경승, 윤승욱과 함께 참여한 후 혼탁했던 시기에 북쪽으로 갔다.

최열이 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에는 우리사회의 격동기 무렵의 그를 “이국전은 김복진의 제자로 일본대학 예술부에 유학해 활발한 활동을 했며 1940년 김복진이 세상을 떠나자 미술연구소를 물려받아 운영했다. 1949년 제1회 국전 조각부 심사위원을 했으나 월북했다.”

22일 학교 교장실에서 앨범을 본 순간 사라진 김복진의 작품이, 이 학교 설립자 박병렬씨 동상이 흑백사진으로 용케 튀어나왔다. 새로 부임한 교장선생도 놀라울 정도로 반갑게 여겼는데 복원돼 동상 예술성을 완상하는 날이 왔으면….(2014년 3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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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초교, ‘김복진’이 만든 박병렬 동상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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