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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풍파 견뎌온 역사현장 ‘홍주읍성’ [홍주일보]
2020/04/20 11:3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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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우의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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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로컬충남]  홍주는 고려시대부터 서해안권의 행정·교통의 중심지로 번성했으며, 1895년에는 현재의 평택부터 서천에 이르는 22개 군현을 관할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는 “홍주는 호서의 거읍이고 그 땅이 넓고 기름지며, 그 백성이 번성하여 난치의 고을로 불려왔다”고 적고 있다. 그 가운데 거친 풍파의 세월을 견딘 역사의 현장이 바로 ‘홍주읍성’이다. 홍주는 홍성의 옛 지명이며, 지금은 충청남도청소재지이다.

고려시대에 홍주는 운주(運州)로 불렸는데, 운주성주(運州城主)였던 긍준이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긍준의 딸이 왕건의 부인이 되면서 홍주는 삼국시대 이후 다시금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래서 홍주읍성 내에서 신라 말과 고려 초의 토성이 발굴된 점은 고고학적으로 의미가 크다. 1356년(공민왕 5)에는 왕사(王師) 보우의 고향이라 해 목(牧)으로 승격됐고, 조선 세조 때 진관체제로 지방행정체계가 개편되면서 충청도의 5군 14현을 관할하게 됐다. 이로써 홍주는 조선시대 내내 지금의 경기도 평택 이남부터 충남 서천에 이르기까지 차령산맥의 서북쪽을 관할하는 행정과 군사의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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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읍성이 자리한 현재의 홍성은 내포(內浦)지역으로 오래전부터 세간의 유명세를 타던 곳이었다. 지금의 예산, 당진, 서산지역에 해당하는 가야산 일대 10개의 고을을 조선시대 이전부터 ‘내포’라고 일컬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라고 했는데, 지세가 산모퉁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큰 길목이 아니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난리도 비켜갔다. 또한 넓고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다 바다를 끼고 있어 각종 곡물과 해산물이 넉넉했다. 그야말로 산세 좋고 지세가 좋아 물산(物産)이 풍부하고 난리 걱정도 없어 사람살기 좋았던 곳이 내포였던 것이다. 그 내포의 중심지가 홍성이었고 홍주의 관아가 있던 곳이 지금의 홍주읍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홍주읍성 성벽은 약 800m 정도이다.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홍주아문 등은 모두 조선시대 건축물이지만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건물과 성벽 등이 확인됐지만 홍주읍성의 처음 축조된 연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이 일대는 백제부흥운동의 최대 거점이었던 주류성으로 추정돼, 살기 좋았던 만큼 많은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홍주읍성은 처음 축조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시대까지도 개축기록은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의 둘레가 533보2척이며,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으로 각 관읍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춰 수축했을 때, 홍주읍성도 1451년에 새로 수축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 4856척, 높이 11척이며,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높이는 2척으로 608개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적대 24개 중 6개, 문 4개 중 1개가 옹성(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이 없으며 성안에는 우물 두 곳이 있고, 본래 홍성천·월계천 등이 있어 해자(성 밖에 둘러 판 못)는 굳이 파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현종 때 한계수가 중수했고, 1824년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수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조양문·경의문·망화문·관영을 지었는데, 이중 조양문은 홍주읍성의 동문이며 홍주의 관문이었다.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로 정면 3칸의 문루로 흥선대원군이 편액 친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현재의 조양문은 1975년 완전 해체 복원된 것이다. 이렇듯 홍주읍성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해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이세영·채광묵·안병찬 등이 이듬해 5월 19일 1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당시 홍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6문의 화포로 공격해 예산의 덕산으로 퇴각시키고 점령한 전투로도 유명하다. 문종 때 성문이 4개 있었고, 북문에는 문루가 없다고 기록돼 있다. 북문은 최근에 복원돼 옛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성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남문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남문지 발굴조사를 통해 남문 문루석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복원했다. 현재 남문은 ‘홍화문’이란 편액을 달았다. 홍주읍성은 구한말 고종 때 대대적인 수리를 한 성곽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읍 터로써의 큰 변동이 없었다. 홍주읍성은 조선시대 초 새로운 축성격식에 의한 축성성곽이라는 점에서도 연구와 보존의 가치가 크다 하겠다. 여기에 더해 홍주읍성과 홍주천주교 순교사, 홍주의병사, 동학 등은 오롯한 홍주의 정신으로 살아있다.

홍주읍성의 군청 앞에는 수령 650여 년의 오관리 느티나무와 홍주아문(洪州衙門), 동헌(安懷堂), 여하정(余何亭) 건물 등이 조선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던 홍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홍주읍성은 우리의 삶의 원형이며, 홍주성의 역사와 문화는 곧 오늘의 시대정신이다.  

[ 한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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